프리다 칼로 (Frida Kahlo)는 20세기 중반의 멕시코 출신의 화가로, 그의 작품은 자아 정체성, 고통, 사랑, 정치적 주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아름다움과 고통을 표현하는 독특한 스타일로 유명합니다.
“나는 미술 선생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미술 선생이 된다는 생각도 없다. 나는 언제나 배우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제대로 그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기법을 제대로 익혀야 하고, 아주 엄격한 자기 수양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하다.”
- 프리다 칼로-
생애: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에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에 돌연변이한 병으로 인해 별세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다채로운 경험과 고통으로 가득한데, 소아마비와 교통사고로 인해 건강이 매우 나빴으며, 결혼 생활 역시 터무니없는 어려움과 갈등으로 가득했습니다.
작품과 스타일: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자화상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었으며, 자신의 감정과 심리적 상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작품은 키안도(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자 화가)와의 관계, 멕시코의 문화와 전통, 사회적 정의 등을 다루었으며, 독특한 스타일로 자아를 표현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풍부하고, 감성적이며 자유로운 상상력을 반영하며, 자주 '나이브 아트'나 '실종형' 예술로 분류됩니다.
유명 작품: 프리다 칼로의 대표작 중 하나는 "자아정체성의 이중 자화상"("The Two Fridas")로, 그림 속에 나타난 두 프리다 칼로는 서로 다른 면을 상징합니다. 그의 다른 유명 작품에는 "자화상 바람개비와 군주의 호박"("Self-Portrait with Thorn Necklace and Hummingbird")와 "다니엘 마르타수의 자화상"("Self-Portrait as a Tehuana") 등이 있습니다.
영향과 유명세: 프리다 칼로는 그의 작품과 개성적인 스타일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으며, 특히 여성 아티스트와 페미니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멕시코 문화와 정치에 대한 표현으로도 주목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예술은 인류의 공통 경험과 감정을 다룬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 : 1925년 9월 17일, 프리다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버스에 올라타고 얼마 후에 충돌이 일어났다. 다른 버스를 탔었는데, 내가 양산을 두고 와서 찾으러 가느라 내렸다. 그래서 망할 놈의 그 버스에 타게 된 것이다.” 전차와 버스가 충돌했고, 프리다 칼로의 몸이 부서졌다. 긴 수술 후, 프리다 칼로는 침대에 누워 석고 깁스 속에 갇혀 지내야 했다. 치료비는 천문학적이었다. 집안의 가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병상에서 프리다 칼로는 학교를 포기했다. “교통사고가 나의 진로를 비롯한 많은 것을 바꿔놓은 이래, 나는 세상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욕망을 채울 수 없었다. 채우지 못한 욕망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는 것 같았다.” 프리다 칼로는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았다. 용기도 생겼다. 교육부 건물에 벽화 작업 중이던 디에고 리베라를 다짜고짜 찾아간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림의 전문가인 당신 의견을 듣고 싶어요. 허영심으로 그림을 그릴 시간이 없습니다. 좋은 화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그것만 말해주세요. 제 작품 세 점을 가지고 왔어요.”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진보 진영을 규합하는 운동가로 이미 유명했던 디에고는 프리다의 그림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세 점의 그림 가운데 ‘벨벳 옷을 입은 자화상’(1926)은 매혹 그 자체였다. 디에고는 무서운 신인을 한눈에 알아봤다. 프리다에게 지금처럼 자신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그림을 꾸준히 그리면 반드시 화가로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한다. 사실 디에고의 조언이 없었다 할지라도 프리다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
3년 동안의 회복 기간을 거쳐 프리다는 1928년에 카추차스 회원들과 다시 만난다. 예비학교 졸업 후 다양한 전문 분야로 진출할 준비를 마친 친구들에게 조금도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대통령 선거운동과 대학 자율화 투쟁에 앞장섰다. 프리다는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친구들은 시위 현장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프리다는 그들보다 더 많이 읽고 썼다.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프리다는 디에고와 사랑에 빠진다. 1910년대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후 멕시코로 돌아온 디에고는 1920년대 거대 벽화들을 연이어 완성하며 화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29년 8월,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디에고의 여성 편력과 거친 성격 및 특유의 오만함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유명했다. 프리다도 디에고의 결함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에고를 선택했다. 사랑만으로는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프리다는 오랜 시간 넓은 세상을 꿈꾸었다. 1925년 1월, 친구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에게 프리다는 미국행을 권유하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멕시코에서 한평생을 보낸다면 우리는 영원히 무능한 사람으로 남고 말 거야. 내게는 여행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게 없어.” 예비학교 시절부터 프리다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싶었다. 병상에서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멕시코 밖에서의 삶을 꿈꾸었다. 프리다는 인생의 목표가 같은 사람을 만나 함께 성장하고 싶었다. 디에고가 적임자였다.
1930년, 프리다와 디에고는 미국으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디트로이트에서 프리다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다. 디에고도 크게 놀랐다. 디에고는 1932년 디트로이트 시절부터 프리다의 작품은 이미 자신을 훌쩍 뛰어넘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예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걸작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4년부터 디에고와 가깝게 지냈던 피카소도 “드렝도 나도 당신도, 프리다 칼로가 그린 것 같은 머리는 못 그린다”는 편지를 디에고에게 보냈다.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 생활은 평범하지 않았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결혼 이후에도 새로운 사랑을 허용했다. 프리다는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펼치며 지적인 토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반겼다. 스탈린과 일전을 벌였던 트로츠키, 인물 사진의 새로운 지평을 연 니콜라스 머레이, 천재 조각가로 불린 이사무 노구치는 프리다의 지성과 열정에 매료되었다. 한편, 디에고는 아름다운 여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충동적이고 미숙했다. 동시에 프리다에게 집착했다. 프리다의 연인에게 권총으로 위협한 일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디에고는 이혼을 강요했다. 1939년 11월에 프리다와 디에고는 이혼한다. 디에고는 이내 무너졌다. 프리다를 다시 찾아온 디에고는 재결합을 애원했다. 1940년 12월, 프리다와 디에고는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프리다는 자신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하는 디에고를 동반자로 인정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했다. 프리다의 소망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되고 싶은 여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43년 프리다는 ‘라 에스메랄다’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만났다. “프리다의 위대한 가르침은 화가의 눈을 뛰어넘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멕시코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프리다의 건강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오른발은 염증 재발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요통도 나날이 심해졌다. 1950년 프리다는 오른발 절단 수술을 받았고,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은 후 또다시 9개월을 병상에서 머물러야 했다. “한 세기 분의 고통이 지속되었다,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그렇다고 마냥 운명 앞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프리다는 반전 평화운동 서명에 참여했고, 개인전을 준비했으며,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의 삶을 통틀어 22번의 외과 수술을 받았다.” 고통도 프리다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녀의 태도는 얼핏 봐도 남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위엄과 자신감이 있었고, 눈동자는 야릇한 빛을 뿜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귀여웠으나, 어딘가 모르게 꽤 성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당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방해가 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천만에, 꼬마 아가씨. 오히려 영광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에게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자, 질투심에 불탄 루페는 여자애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루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더 화가 난 루페는 뒷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 여자아이를 쏘아보았다. 여자아이는 표정만 굳어질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루페가 노려보자 여자아이 역시 말없이 루페를 노려보았다. 루페는 무척이나 놀란 눈치였고 오랫동안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저 애 좀 봐! 저렇게 어린애가 자기보다 크고 어른인 여자를 겁내지 않잖아. 난 왠지 저 애가 맘에 들어.”
여자아이는 세 시간쯤 있다가 “안녕!”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기둥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이 그녀였고, 그녀의 이름이 프리다 칼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후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녀가 나의 아내가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는 그의 작품과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의 예술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연구되고 감상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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